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라
< 돌들이 말할 때까지 > Until the Stones Speak 김경만 KIM Kyungman | 2024 | 101min | Korea | 12세

“그저 우리 4·3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남았다는 것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_ 화북리 박순석

제주4·3사건의 수형인에 관한 유일한 공식 문서인 ‘수형인 명부’에 적힌 2,530명은 당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전국 15개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미군정이던 1947년 4월 이후, 제주에는 그저 살아온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4·3과 연관되어 수용 생활을 했고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제주4·3을 겪은 다섯 여성 생존자들, 오라리의 18세 양농옥, 화북리의 20세 박순석, 가시리의 22세 박춘옥과 20세 김묘생, 의귀리에 살던 23세 송순희의 증언을 담는다. 그리고 이제 자식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역사적으로 남”긴다.
양농옥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던 아버지”가 오라동 운동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박순석은 사회주의를 공부하다가 빨치산이 되어 3년 구형을 받았다. 군인들이 잡아갈까봐 17세에 결혼한 박춘옥은 살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고문을 당하고 군사재판을 받은 송순희는 1년 구형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형을 살았다. “말 잘 못하면 간첩으로 몰리는 것이 아니냐”고 두려워하는 김묘생은 딸이 대신 증언을 이어 간다.
이 영화는 제주4·3을 설명하고 피해를 수치화하기보다는, 다섯 생존자의 증언을 따라가면서 이들의 재판과 수용 생활을 했던 그 모든 과정이 무효임을 증명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슷하지만 다른 사연을 가진 이 다섯 개의 이야기 끝에,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와 4·3 생존 수형인 18명은 불법 군사재판에 대해 명예 회복을 요구하며 2018년 10월 29일 재심을 요청한다. 그리고 2019년 1월 7일, 법원은 이들에게 공소기각(무죄) 판결을 내려 70여 년 만에 억울함을 풀었다. 군사재판의 절차적 불법성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절제되고 신중한 이 기록의 서사에서 제주의 자연은 피해의 장소이자 침묵의 목격자 역할을 한다. 숨어 지낸 바닷가 동굴에서 보았을 푸르디 검은 바다, 중산간에서 굶주림을 견디던 동료와 함께 바라봤을 설원, 집과 함께 불이 붙어 모든 것을 삼켜버렸던 그 오름, 살림이 굴러다니며 쓸쓸한 폐허가 돼버린 거주지 같은 이미지는 내전과 국가 폭력의 상흔이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이 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해 돌봄의 행위를 지속한 공간이기도 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다섯 생존자의 증언은 파도 소리와 새소리, 또 바람 소리, 마을 골목, 빨래 널린 앞마당, 허물어진 양조장, 눈 맞는 돌담, 비 내리는 계곡 같은 제주의 곳곳과 교차로 제시된다. 감독은 이 아름다운 곳의 풍광이 그녀들과 함께 ‘역사의 증언자’라고 강조한다. 제주는 그렇게 여섯 번째 증언자로 출연한다.
‘전쟁의 시간, 돌봄의 응답’이라는 주제에서 이 영화는, 여성의 위치에서 내전이 남긴 상처와 시간을 살피고 그 이후의 돌봄과 치유의 몫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감독 김경만은 그런 피해 여성들의 증언에 힘을 싣고 그들의 목소리에 오롯이 귀 기울인다. 감독은 젠더적 경험의 직접적인 재현에 신중을 기하며, 관객에게 역사적 돌봄과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영화 말미에서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000년에 제정된 「제주4·3사건특별법」이 개정되고, 2003년 이후로 중단된 『제주4·3진상보고서』도 발간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보듯이 활동가들의 증언 수집과 학계의 연구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제주4·3의 진상 규명은 여전히 젠더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알지 못하던 제주4·3 당시 여성의 투쟁과 활동, 희생을 알려주는 시도이며 전쟁의 시간을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기억으로 역사화하는 그 시작점에 있다.

심혜경(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돌들이_037.jpg
전쟁의 여신과 데이터 탐정이 들려주는
평행우주 대서사시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 Graeae: A Stationed Idea 정여름 JEONG Yeoreum︱2020︱34min︱Korea︱전체
< 긴 복도 > The Long Hole 정여름 JEONG Yeoreum︱2021︱36min︱Korea︱전체

정여름 감독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과 〈긴 복도〉는 각각 용산 미군기지와 원주 미군기지 캠프 롱(Camp Long)을 영화적 장소로 취한다. 2025년 현재 두 기지는 모두 미군이 떠난 상태다.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의 이전은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2022년 말에 완료되었다. 1955년 세워진 캠프 롱은 2010년 완전 폐쇄되어 한동안 방치돼 있었다. 현재는 두 기지 모두 시민들을 위한 공립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아름다운 녹지로 뒤덮인, 가족들이 여유롭게 자연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임을 강조하는 정부의 공원 청사진은 해당 지역이 전쟁이나 미군의 탈식민적 점령에서 벗어났음을 호기롭게 선언한다. 그런데 전쟁의 그림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캠프 험프리스를 중심으로 확장되고 강화되었을 뿐이다. 단적인 예로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 즉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증액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정여름 감독은 미군기지 혹은 전쟁 기계를 영화화하기 위해 단순히 지워진 과거나 보이지 않는 현재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평행우주의 세계관과 시간 여행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두 영화는 모두 물리적 세계, 데이터로 기록된 가상 세계, 시청각 스펙터클 세계, 역사적 기록의 세계, 사적 기억의 세계 등 평행 세계의 레이어들을 오가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역설을 드러낸다. 전쟁의 이미지와 서사는 단순히 공격 무기나 급박한 전시 상황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놀이, 소비 생활, 기지에 고용된 지역민, 양지와 음지의 금융 흐름, 누적된 기억과 감정들이 전쟁을 구성한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의 제작 시기는 용산 미군기지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던 때다. 군사 보안시설인 용산기지는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높은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안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일반인들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될 뿐 아니라 구글맵에도 기지는 평평한 녹지 이미지로 가려져 있다. 하지만 기지 내 미군들이 GPS(미국 위성항법시스템) 기반의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 GO〉(2016~현재) 플레이를 위해 기지 내 기념물을 ‘포켓스톱(아이템을 획득하거나 유저끼리 결투가 이뤄지는 장소)’으로 등록하면서 내부가 드러난다. 다수의 미군들이 일상의 놀이를 위해 군사기밀을 자발적으로 누출한 것이다. 이는 영화의 화자가 금지된 공간을 해킹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전쟁 기계 혹은 사이버네틱스의 ‘완벽한 통제’라는 허상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등록된 기념물들 중 하나는 일제가 일본군 사망자를 위해 설립한 위령비인데, 이를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사망자를 위한 충혼비로 명칭만 바꿔 재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념비는 이미 ‘포켓몬 고’ 게임을 선취한다. 또한 미군은 전략적으로 젊은 군인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기지 내 카페테리아에 미국 프랜차이즈 식당을 공들여 시뮬레이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장 미국적인 것은 텍사스 같은 특정 지역 문화와 철 지난 유행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들의 기밀 유지를 위해 구글맵을 뒤덮었던 녹지는 시민공원을 통해 현실화되면서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된다. 이렇게 현실과 가상, 과거와 현재, 놀이와 전쟁, 자연과 인공물, 진짜와 가짜는 구분되지 않고 실재의 레이어를 구성한다. 화자는 하나의 눈과 이빨을 갈아 끼우며 공유하는 세 자매 신, 그라이아이 중 전쟁의 여신인 엔니오의 눈으로 전쟁 기계의 흔적을 포착하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잠재적인 두 자매, 펨프레도와 데니오의 눈이 공존한다.
〈긴 복도〉는 폐허가 된 캠프 롱의 기지를 물리적으로 탐색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던 중 구글 어스의 맵에서 빨간색 압정으로 표시된 ‘캠프 롱 ATM’의 지리 데이터값을 발견한다. 캠프 롱도 군사 보안시설이어서 다른 곳은 전혀 위치 정보가 뜨지 않는데 ATM의 기록만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의 화자인 탐정은 이 정보가 1984년에 기록되었음을 발견한다. 구글 어스는 2004년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었지만, 오래전부터 전 세계를 감시해 왔음을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시도라와 페도라의 엽서와 일기에서 양지의 금융 기록만이 아니라 PX를 통한 블랙마켓의 금융 흐름을 추적한다. 미군기지에서 일한 이시도라는 “그 시절이 행복했던 때였다”고 회상하고, 그 시절로 되돌리기 위해 태극기 부대 시위에 나간다. AI 프로그램은 이시도라를 포함한 군무원들의 단체 사진을 ‘행복한(행복), 중립의(neutral), 두려운(fearful)’으로 분류해 읽어낸다. 그런데 1950년대 미군들이 의도적으로 불을 질러 지역민들의 생활 터전을 파괴하며 캠프 롱을 설립했다는 사실은 이 ‘행복’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역사적인 정동인지를 지시한다. 위성 사진과 구글 어스 같은 전쟁 기계는 숨기고 통제하려 들지만, 또한 시간의 축적 속에서 의도치 않게 전쟁의 핵심인 탈식민의 경제와 보이지 않는 기지 주변인들의 삶과 감정을 노출시킨다.

조혜영(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Graeae_Still_01.jpeg
'희생의 시스템'을 넘어서
< 오키나와에 사랑을 담아 > From Okinawa with Love 스나이리 히로시 SUNAIRI Hiroshi︱2023︱102min︱Japan, United States︱15세

‘현재 일본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중요한 사진작가 중 한 명.’ 이시카와 마오에 대한 소개다. 20대 초반, 이시카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기지촌으로 들어갔다. 이후로 40년간, 그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오키나와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오키나와의 식민성과 글로컬(Glocal)한 군사주의의 문제를 다뤄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렸다. 그건 기지촌 여성과 흑인 병사들에 대한 사랑과 우정이었다.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이라 불린다. 일본 내 미군기지의 70% 이상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고, 그 면적은 오키나와 본섬의 20%에 달한다. 옥빛의 바다와 스노클링, 다양한 먹거리 상품 등으로 유명하지만, 그 ‘천혜의 자연’은 1879년 메이지 정부가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병합하면서 시작된 피의 역사 위에 서 있다. 오키나와는 제국주의 일본의 첫 식민지였다.
식민지 오키나와에서는 수탈과 착취는 물론 류큐 문화와 류큐인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차별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병참 기지로 오키나와를 선택한다. 곧 태평양 전쟁 중 최대 사망자를 낸 오키나와전이 발발한다. 이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9만 명 가운데 3만 명이 오키나와인이었고, 민간인은 약 9만 명이 희생됐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민간인이 사망한 원인은 다름 아닌 집단 자결이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 포로가 되면 극심한 치욕과 고통을 당할 것이라며, 그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세뇌했다. 내부 정보나 자원이 미군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학교 교장이나 교사 등 지역 지도층 주도로 집단 자결이 행해졌다. 사람들은 동굴 같은 곳에 숨어들어 서로 목을 베거나 수류탄을 터트렸다. 오키나와 곳곳에 ‘집단 자결지’가 남아 있고, 여전히 땅을 파면 희생자들의 유골이 발견된다. 현재 일본 극우는 (위안소 운영과 강제 동원뿐 아니라) 집단 자결의 역사 역시 부정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야마토 일본에 동화되기 위해 애썼지만, 일본 정부는 그들을 일본인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세계대전의 사활을 건 접전지로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은 명백한 패전을 앞두고 오키나와를 대가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천황제를 지키고자 했다. 이에 더해 패전 후에는 오키나와를 미국에 넘겨 버린다. 미군정의 시작이었다.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를 가리켜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희생의 시스템에선 누군가의 ‘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등이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
오키나와는 여전히 이 시스템의 중심에 있다.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때, 그 조건은 미군기지의 존속이었다. 아이들과 여성들이 미군에 의해 폭력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은 반복되었고, 미군에 의한 교통사고나 헬기 추락사고 등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은 위협받아 왔다. 그들이 여전히 미군기지에 반대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이어 가는 것은 이것이 생명과 존엄의 문제이자, 근대 일본이 뿌리박고 있는 폭력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섬에서, 바로 이 고통을 말하기 위해, 이시카와는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랑과 우정을 찍었다. 그는 다큐의 감독인 스나이리 히로시의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한 장씩 넘겨 보며 기지촌 여성들이 얼마나 활기 있었는지, 흑인 병사 “톰, 지미, 스미스”가 얼마나 개성 있는 남자들이었는지 증언한다. 그러므로 사랑이었다. 이시카와는 흑인 병사를 사랑하는 일이 왜 나쁘냐고 반문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것과 미군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일이라고. 그럴 수 있는 건, 무엇보다, 이시카와가 기지촌의 삶에서 또 다른 희생의 시스템을 목격했기 때문일 터다.
기지촌 여성을 멸시해 그들의 위안 노동을 별스러운 것으로 배제하고 은폐함으로써 ‘정상성’을 유지하는 희생의 시스템, 인종차별에 기대어 백인 중심적인 군사주의를 떠받치는 희생의 시스템. 이시카와는 필름 위에 빛을 쌓아 기지촌 여성들과 흑인 병사들의 형상을 빚어냈듯이 젠더와 인종, 계급이 중첩된 억압의 구조 속에서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곱다, 곱다” 어루만진다. 그렇게 세계가 원하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납작하게 뭉개진 이미지들에 개별적 서사를 덧대어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스나이리는 이시카와의 역사적인 작업들을 경쾌한 리듬으로 엮어내는데, 이때 활용되는 레트로한 감성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적인 것으로 되살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이시카와의 작업을 타고 1970년대를 여행하던 스나이리의 카메라는 지금/여기에서의 이시카와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이어진다. 이시카와의 카메라가 그랬듯이, 스나이리의 카메라 역시 이시카와의 시간을 품어 토닥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큐의 끝에 이르러 이시카와의 철학과 온전히 만나게 된다. “추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의 인생, 나는 사람이 좋다.”

손희정(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Mao_Ishikawa.png
포화 속에서도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 림보 안에서 > In Limbo 알리나 막시멘코 Alina MAKSIMENKO︱2024︱72min︱Poland︱전체

2025년 9월 초입, 남한 언론은 연일 북·중·러의 만남으로 떠들썩했다. 2025년 중국 열병식에서 세 정상이 나란히 선 장면 때문이었다. 시진핑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푸틴, 왼쪽엔 김정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담긴 그 사진은 신냉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선전 포스터로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세 정상의 맞잡은 손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에 맞선 다자주의, 반미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 정치적 쇼를 속 편하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계속되는 휴전 요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북한군의 병력을 지원받아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왔다. 북한은 생때같은 군인들의 목숨을 갖다 바친 대가로 29조 원에 달하는 경제적 원조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과 김정은의 웃음이 풍기는 악취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듯했다. 그리고 서늘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기록인 〈림보 안에서〉를 통해 목격했던 사람, 동물, 피아노 소리가 떠올랐다.
〈림보 안에서〉는 2022년 2월, 키이우 근교의 작은 마을인 이르핀에서 시작된다. 다리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던 알리나에게 포격 소리가 들려온다. 러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포탄과 함께 조용하던 동네는 최전선이 돼버리고,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인 채 탈출을 시작한다. 공습이 시작된 지 13일째 되던 날, 알리나도 피난민의 행렬에 동참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더 작고, 더 고요한 마을에 위치한 부모님의 오두막. 그는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전쟁의 시간을 카메라로 기록하기로 한다.
어머니 테티아나와 아버지 톨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성실하게 삶을 꾸려온 사람들이다. 음악교사였던 테티아나는 전쟁 속에서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통해 학생들과 연결되고, 음악을 이해하고 피아노로 표현하는 법을 계속 전한다. 톨라는 스무 명에 가까운 고양이와 버려진 동물들을 돌본다. 퉁명스러운 성격이지만, 집을 관리하고 음식을 만드는 일 역시 그의 몫이다. 작은 마을의 작은 오두막은 그에게 쉽게 떠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그것이 오두막에 도착한 첫날부터 우크라이나 밖으로 탈출하자고 설득하는 알리나의 말을 계속 외면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다.
테티아나와 톨라는 고집스럽게 마을을 지키고 있지만 피난은 이미 시작되었다. 공동화된 동네를 돌아다니며 (도망간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채로) 홀로 남은 동물들을 먹이는 일과, 공습 속에서도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폭격이 만들어내는 굉음에 선율을 더하는 일. 이는 무심한 듯 이어지는 일상이지만, 때로는 숭고해 보인다. 화려한 열병식에 전시되는 뒤틀린 웃음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생의 무게를 품고 있다. 이 행위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했던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현재를 만들었고, 또 다시 ‘평범’하기를 꿈꾸는 미래를 준비한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보통의 내일을 박탈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가오는 날’이라는 시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시간’이라는 매우 인간적인 개념 혹은 인간적인 감각 안에 포함되는 존재가 비단 인간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톨라가 살피는 동물, 테티아나가 흥얼거리는 음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고 필수적인 기계와 기술들, 그러니까 라디오라든가 스마트폰이라든가, 전기, 콘센트, 혹은 피아노 같은 것들이 그 시간을 타고 미래로 함께 흘러간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폭력을 이토록 ‘작은 우리’가 끝내 이겨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점점 밀려드는 파괴와 죽음의 그림자는 일상을 척박하게 만들고 그들의 작은 오두막에서 다정함과 여유를 휘발시킨다. 가족들은 의기소침해지고, 끝날 것 같지 않는 불안과 그에 뒤따르는 절망 속에서 요동치게 된다. 무엇보다 톨라가 아끼던 고양이의 죽음은 가족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티게 만들었던 바닥을 허물어 버린다. 알리나는 감독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소한 다툼에도 예민해졌고, 침묵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사소한 오해는 이내 커지고 말았다.” 〈림보 안에서〉는 전쟁이라는 현실을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스크린 앞에 앉은 우리를 거대한 심연처럼 벌어져 있는 ‘림보’로 이끈다.
림보란 가톨릭에서 천국과 지옥의 경계에 위치한 중간 지대를 일컫는 말이다. 형벌이나 고통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서 누리는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도 못한 장소. 그곳에는 예수를 알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한 영혼들이 머문다. 어쩌면 죄 없는 자들이 죄 지은 자들을 대신해 미래 없음의 시간성에 갇혀 버린 그곳. 〈림보 안에서〉는 그 막막함 안에서도 지속되는 생과 일상이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전한다. 여기에서 어떤 ‘내일’을 만들어 갈 것인가 생각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일지도 모르겠다.

손희정(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IN_LIMBO_dir_Alina_Maksimenko_WajdaStudio2024_main_still.jpg

한·미·일 공조 체제와 망언의 네트워크
< 주전장 >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the Comfort Women Issue 미키 데자키 Miki DEZAKI︱2019︱122min︱United States︱전체

2025년 2월 16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피해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길원옥 선생님이 별세했다.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2월 19일, 제168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진행되었다. 참담하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소속 극우 인사가 “길원옥은 돈 벌러 자진해서 (위안소로) 갔다”는 등의 망언을 외쳤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
12·3 내란 이후 K-극우는 더욱 확장되고 더욱 대담해졌다.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은 그동안 차근차근 쌓아온 ‘저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뉴라이트 역사관은 이들이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온 성장의 자양분이었다. 뉴라이트는 일본군‘위안부’ 동원이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부정하고, 일본 제국과 위안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왜곡해 왔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자발성 논란’은 본질을 흐리는 뒤틀린 프레임일 뿐이다. 중요한 건 전시에 위안소를 운영한 일본군의 조직적 인권 유린 및 성 착취 그 자체다. 설사 ‘자발성’을 논한다 하더라도 그 핵심은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위안소에 갔느냐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느냐에 있다. 납치든, 사기 취업이(라 부르는 유괴)든, 혹은 알고 간 것이든,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한번 ‘위안부’로 등록되면 일본군의 ‘특종 군수품’으로 관리되었고, 자유롭게 떠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극우 인사들은 심지어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동상반대모임)’ 같은 활동도 전개 중이다. 원래 수요시위가 열리던 자리를 점거해 반대 집회를 여는 것은 물론, 2024년부터는 ‘소녀상 철거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평화의 소녀상’에 검은 비닐봉지를 씌우거나, ‘흉물 소녀상을 철거하라’ 등의 내용이 적힌 어깨띠를 두르는 식의 조롱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동상반대모임이 결성된 2019년은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 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미래사)를 출간하고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로 부상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최근 이 동상반대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물이 극우 성향의 역사 교육을 표방하는 단체인 ‘리박스쿨’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주전장〉은 바로 이 문제의 몸통과 뿌리를 파고드는 다큐멘터리다. 감독인 미키 데자키는 유튜브에 “일본의 인종차별”에 대한 동영상을 올린 뒤 일본과 미국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극우 네트워크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오히려 일본의 인종차별을 더욱 절감하게 된 그는 이들을 조직하고 움직이는 데 활용되는 강력한 ‘땔감’ 혹은 ‘거푸집’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였다.
다큐는 일본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수정주의 이데올로그들을 인터뷰하고 그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역사수정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접근해 들어간다. 그리고 비로소 ‘한·미·일 공조 체제’라는, 한국·미국·일본 극우의 역사적 기반이 드러난다. 여성학자 김주희는 이렇게 작동하는 극우의 담론 지형을 “망언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다큐는 미·일 간의 네트워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 한국의 극우가 동참하고 있다는 건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다.
극우 세력과 ‘위안부’ 피해부정론자들은 하나의 뿌리와 몸통을 공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극우 유튜버나 정치인 들처럼 극우의 세계관을 상품으로 삼아 돈을 벌고 표를 버는 자들을 통해 점점 성장하고 있다.
망언과 역사 부정은 일본,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영을 갈라 ‘우리 편’을 결집시키는 정치 전략이자 성폭력을 남성의 본능으로 치부하고 여성에 대한 성 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남성 중심 가부장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문화 전략이다. 무엇보다 여성과 전쟁 피해자의 목소리를 왜곡하거나 역사로부터 삭제함으로써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낡은 지배전략이기도 하다. ‘여성의 문제’는 이처럼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그리고 열강의 국익 우선주의적이고 때로는 약탈적이기까지 한 외교 정치가 만난 자리에서 쉽게 희생양이 된다. 이용해 먹은 뒤 치워버림으로써 근대 국민국가의 ‘정상성의 신화’를 세우는 것이다.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가 아베와 일본 우익들에게 왜 이토록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 끔찍한 네트워크의 원초적인 장면을 폭로한다. 지금
이 시점에 〈주전장〉을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눠야 할 이유다.

손희정(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이 글은 필자의 다음 글에서 일부를 발췌·인용했습니다. 손희정, “스스로 검은 봉지를 뒤집어 쓰는 자들”, 〈경향신문〉, 2025.03.05.
SHUSENJO_Still_2.jpg
'전쟁의 시간'에 예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 그라운드 제로로부터 > From Ground Zero
가자의 영화감독들 Various Directors︱2024︱114min︱Palestine, France, Qatar, Jordan, United Arab Emirates︱12세

시각매체 이론가 폴 비릴리오는 시각 기계와 전쟁은 긴밀하게 연루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현대 전쟁은 가능한 많은 정보를 신속하게 확보해 전황을 파악하고 즉각적으로 타격하기 위해 비행기와 카메라를 결합하는 식으로 원격 위상학적 시각 기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는 더 잘, 더 빨리 보고자 하는 가속화 욕망, 즉 결국은 소멸과 파괴의 미학으로 귀결되는 “지각의 병참학”으로서의 영화를 비판한다.
오늘날의 전쟁은 어떤가? 군사용으로 개발된 무인항공기 드론은 이제 아마추어도 쉽게 사용하는 시각 기계가 되었고, 전쟁의 공격 시점을 친근하게 만든다. 드론은 다양한 각도와 거리로 정밀하게 움직이며, 첨단 AI를 통해 무인 원격 작동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은 살인의 죄책감을 체계적으로 무디게 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정밀 타격’을 통해 ‘부수적 피해’를 줄인다는 주장과 달리, 드론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물론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서도 계속 보고되고 있다.
한편 비릴리오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또한 영화를 항상 외부의 원거리 시점에서 작동하는 공격적 시각 기계로만 한정짓는 문제가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는 민간인 피해자들 또한 자신이 겪는 전쟁을 내부로부터, 일상의 한복판에서 기록하고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긴박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와 렌즈를 가리는 폭발 먼지, 드론과 전투기의 소음은 전쟁 속에 내던져진 신체 그 자체가 된다.
팔레스타인 감독 라시드 마샤라위가 제작한 〈그라운드 제로로부터〉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또 다른 기획 방식을 보여준다. 〈그라운드 제로로부터〉는 가자 지구 임시 거처에 살고 있는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직접 연출한 3~6분 분량의 숏폼 스물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인칭 다큐, 에세이, 드라마, 뮤직비디오, 페이퍼 스톱모션 등 다양한 형식을 가진 영화들은 촬영 단계부터 각기 다른 창작자들의 기획과 개성이 크게 두드러진다. 그렇기에 전체적으로 긴박함보다는 사후적이고 명상적인 방식이 특징적이다.
폭격과 죽음의 현장에서 촬영된 푸티지들의 사용조차 그렇다. 〈플래시백〉(이슬람 알 제리)과 〈메아리〉(무스타파 콜랍)가 대표적 예다. 전자는 폭격으로 무너진 집에서 죽음을 경험한 소녀의 트라우마를 표현하기 위해, 당시 촬영된 푸티지를 악몽처럼 삽입한다. 피난민촌 공중에서 쉼 없이 윙윙거리는 드론 소리는 그녀를 공포의 현장으로 되돌려 놓기에 피할 곳은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헤드폰밖에 없다. 후자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녹음된 전화 대화 소리를 반복해 듣는 한 남자를 보여준다. 황급히 대피할 곳을 찾는 여자는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그리움과 상실은 녹음된 대화의 반복된 재생 행위로 표현된다.
교육 또한 여러 숏폼의 주요 주제다. 〈선생님〉(타메르 니짐)은 학교도 학생도 사라진 텐트촌을 배회하는 전직 교사의 일상을 따라간다. 〈학교 가는 길〉(아메드 알 다나프)에서는 한 소년이 매일 폐허가 된 학교 터를 찾고, 이스라엘 군인에게 살해된 선생님의 묘비 앞에서 그를 기린다. 이 담담한 의식은 이스라엘이 앗아간 소년의 일상과 사랑하는 이들의 빈자리를 애통하게 표현한다. 〈아이들의 애니메이션〉(카미스 마샤라비)은 피난민촌 아이들이 종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서사화하도록 이끈다.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는 한 남매의 팔에 새겨진 커다란 문신을 보여준다. 이는 엄마가 쓴 아이들의 이름으로, 혹여 이들이 죽었을 때 그들을 식별하기 위한 대처다. 죽음이 아이들의 피부에 새겨진 상황에서도 이곳 사람들은 삶의 파편을 이어 붙이며 돌봄을 포기하지 않는다.
몇몇 영화는 아예 창작의 조건을 성찰한다. 〈영화, 미안〉의 감독 아메드 하수나는 제작 현장의 클래퍼를 불쏘시개로 태우면서도 영화를 향한 욕망을 꺾지 않는다. 하지만 낙하산 식량 꾸러미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결국 영화보다 생존이 먼저임을 인정한다. “영화야 용서해줘. 카메라를 치우고 다른 이들처럼 뛰어야겠어.” 〈와니싸 택시〉의 감독 에티마드 와샤는 가자 지구의 마부와 당나귀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중에 감독 본인의 동생과 조카들이 사망하면서 계획했던 영화 촬영을 중단한다. 감독은 카메라 앞에서 마부가 죽고 당나귀만 돌아오는 장면으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더 이상 기력이 없다는 증언으로 영화를 끝낸다. 생존과 죽음은 문자 그대로 영화 창작의 조건이다. 이 영화들은 전쟁의 시간에 예술의 불가능성과 동시에 예술의 불가피함을 실천한다. 그들은 기어이 파괴 대신 창조, 미래 없음 대신 상상력과 돌봄의 공간을 만든다.

조혜영(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이 글은 전주국제영화제가 발행하는 〈J매거진〉(2025.04.)에 수록된 내용을 부분 편집해 재수록한 것입니다.
시대를 건너 이어지는 연대의 걸음
< 눈길 > Snowy Road 이나정 LEE Na-jeong︱2017︱122min︱Korea

“세라는 탁자 위에 올라서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멋진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금빛 구름떼가 서쪽 하늘을 뒤덮고 새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_위안소 안에서 영애가 종분에게 읽어 주는 『소공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1888) 중

영애와 종분은 소설책을 읽고, 친구 오빠에 대해 가슴 설레는 이야기를 한다(소설의 내용처럼, 여학교의 하녀가 돼버린 세라와 베키의 우정과 사연은 영애와 종분의 것과 닮아 있기도 하다). 함께 모인 밤, “버들피리 소리만 삐삐리 삐리 삐 삐리리리.” 옆방의 아야코는 이난영의 유행가 ‘봄 아가씨’(1935)를 가지런히 부른다. 여느 소녀처럼, 소공녀(A Little Princess, 小公女)처럼 말이다. 그렇다. 하지만 여기는 위안소이고, 세 명의 10대는 일본군‘위안부’다. 영화 〈눈길〉은, 으레 소설책을 읽고 유행가를 부르며 두근거리는 연애 감정들을 소곤댈 소녀들이 전쟁과 폭력에 무방비로 동원된 이야기이다.
전쟁과 여성의 중층적 관계는 물론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 〈눈길〉은 KBS 광복 70주년 삼일절 특집극으로 방영(2015년 2월 28일과 3월 1일)된 이후 극장 개봉해 이제는 가장 대중적인 극영화가 되었다. 1944년 충청남도 강경, 가난하지만 씩씩한 종분과 부잣집 딸 영애가 주인공이다. 영애는 근로정신대로 속아, 종분은 납치돼 만주 목단강 근처 위안소로 끌려간다. 일본군 부대에서 두 소녀는 성폭력과 폭력의 공포 속에서 서로를 돌보고 의지하며 살아남으려 애쓴다. 그리고 현재, 그간 영애의 신분으로 살아온 종분은 옆집에 홀로 살아가는 소녀 은수에게 영 마음이 쓰인다. 영화는 시대를 넘나들면서, 일본군‘위안부’를 주제로 하는 영화가 어떤 서사와 재현의 윤리를 드러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와도 같은 작품이다.
국가-민족주의의 폐해, 역사적 채무의 무게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대신 〈눈길〉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여성을 통해 하위 주체들의 연대에 주목한다. 이제 곧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을, 역사의 주체로 기록될 영애의 아버지나 오빠는 정작 영애를 위해서는 해준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옥 같은 전쟁에서, 어쩌면 그 이후의 삶에서 종분이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과, 종종 영애 같은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오늘 굳은 상흔을 가진 종분이 손을 내미는 대상은 그래서 또 다른 상처를 지닌 소녀 은수이다. 학교와 사회, 국가는 은수에 대한 보호의 책임을 지거나 돌봄의 윤리를 갖길 거부한다. 영애와 종분에게는 없었던, 소녀 은수에게 새 삶을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여성 연대체로서의 종분과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인 구청민원실의 윤옥이다.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마지막 장면, 소녀 영애와 현재의 종분이 손을 잡고 나란히 눈길을 걷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얼핏 나이 든 여성과 소녀의 대화로 보이는 이 장면은 “네가 있어 여태 내가 살았지”로 마무리된다. 이는 가려진 역사의 장막 뒤에서 열심히 살아온 선배 여성의 정체를 소환해 그녀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의 삶이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는 듯, 지난날 여성의 삶과 역사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또 눈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여전히 풀어내지 못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소녀상을 연상시킨다. 전쟁 범죄에 대한 법적·인권적 가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시대적·세대적·젠더적 공감의 여성 연대를 매우 세련되게 상징화하는 것이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우리가 지금 왜 〈눈길〉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지, 이나정 감독의 목소리로 그 이유를 대신 전한다.

“ 폭력은 언제나 더 약한 존재를 짓밟아 왔고, 힘의 논리와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피해는 지금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 늦기 전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_드라마 〈눈길〉 제작의 변 가운데

심혜경(프로젝트38, 영화평론가)

*〈눈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프로젝트38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project38)과 팟빵 및 애플 팟캐스트(38페이지)에서 제3회 전쟁과여성영화제 특별판(시즌 1, 에피소드 12)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일부는 『소녀들- K-pop, 스크린, 광장』(조혜영 엮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7) 가운데 「김새론: 뉴-걸 혹은 새론-소녀」(심혜경)를 발췌·재편집한 것입니다.

c47f8d2f1903573edcbeece77216514bffd790bc_(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