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가자의 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기를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 Put Your Soul on Your Hand and Walk
세피데 파르시 Sepideh FARSI | 2025 | 113min | France, Palestine | 12세 | 10월 31일(토)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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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 북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파티마 하수나는 고향과 사진을 사랑하는 스물넷의 여성이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도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는 사진작가 파티마의 시선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의 환한 미소와 닮았다. 그의 사진은 죽음과 파괴로 점철된 현실과 함께 잔해 속에서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활기찬 움직임, 반쯤 무너진 건물 고층에서 빨래를 말리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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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시절 이란에서 반체제 인사로 투옥되었다가 망명해 파리에서 활동해온 세피데 파르시 감독은 2024년 초 가자에 들어가려다 봉쇄에 가로막힌다. 대신 카이로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난민 친구를 통해 파티마를 소개받는다. 2024년 4월 24일 첫 통화를 시작으로 둘은 약 1년간 왓츠앱으로 영상통화를 이어간다. 세피데는 파티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우리 두 사람의 삶 모두 얼마나 벽과 전쟁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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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구성은 소박하다. 카메라는 주로 세피데의 휴대폰 화면 속 파티마를 비춘다. 파티마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먹고 싶은 음식과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한다. 그의 친구와 가족 들이 화면에 얼굴을 내밀고, 세피데는 통화 중 외출한 고양이에게 문을 열어주려고 잠시 자리를 뜨기도 한다. 인터뷰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을 잇는 휴대폰 속 작은 화면은 그들이 처한 조건의 차이까지 좁히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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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밖에서는 전쟁이 계속된다. 헬기와 드론의 웅웅거림, 폭격 소리가 대화 내내 스며들며 긴장과 공포를 전달한다. 카메라가 공격의 현장으로 향하지 않아도 그 소리는 파티마의 말과 웃음이 어떤 위협 속에서 이어지는지 전해준다. 관객은 폭격의 순간을 목격하는 대신, 언제 폭격이 닥칠지 모르는 시간을 그와 함께 견딘다. 휴대폰 화면의 소박함은 얼굴의 작은 변화에, 소리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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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난과 상실에도 희망을 잃지 않던 파티마는 휴전을 향한 기대가 거듭 좌절되면서 점차 빛을 잃어간다. 친한 친구를 잃고 굶주림이 이어지면서 얼굴은 야위고, 웃음을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세피데는 파티마의 존재가 점점 옅어져가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터넷 연결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통화 도중 갑자기 연결이 끊기는 일도 잦아진다. 세피데는 인터넷이 다시 연결되기를 초초하게 기다린다. 그저 화면이 멈춘 것인지, 파티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동안, 통화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가 제발 살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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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현재화한다. 화면 속 파티마는 지금 우리 앞에서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마주하는 순간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알고 보더라도 다시 연결되기를, 다음 통화에서도 그 얼굴과 만나기를 바라게 된다. 기록된 시간은 되돌려 볼 수 있지만 그가 살아갈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큰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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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5일, 세피데는 파티마에게 둘이 함께 만든 영화가 칸영화제 ACID 섹션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파티마는 가자로 돌아올 수 있다면 참석하겠다고 말한다. 여권과 여행을 의논하던 둘은 곧 다시 연락하자고 약속한다. 그리고 다음 날,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티마와 가족들이 목숨을 잃는다. 일상적인 작별 인사는 끝내 마지막 통화가 된다. 영화는 이 통화 직전에 파티마가 세피데를 위해 촬영한 가자 거리의 롱테이크를 배치한다. 휴대폰 화면 속 얼굴을 바라보던 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폐허 사이를 통과한다. 그 위로 파티마의 목소리가 흐른다. “세피데, 괜찮아요. 함께해준 걸로 충분해요. 괜찮아요. 제 말을 들어주고 서로 공감할 수 있어서 고마워요.” 언젠가 가자 거리 구석구석을 함께 걷자는 약속은 실현되지 못한 미래로 남는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관객 역시 약속을 건네받는다. 언젠가 가자 거리를 걸을 수 있기를. 그녀의 영혼을 손에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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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영(전쟁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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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박동 
시라트 Sirat
올리베르 라셰 Oliver LAXE | 2025 | 115min | Spain, France | 15세 | 10월 31일(토)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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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트 >의 기이한 점 하나. 영화에서 소리내는 기계들은 몇 번이고 위압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스피커로 무슨 소리를 내보낼지 결정하는 인간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군인들이 몰려와 대피 명령을 내릴 때 음향 콘솔에서 헤드폰을 낀 사람이 단 한 번 잠깐 나타나긴 하나, 그가 엔지니어인지 디제이인지는 불분명하다. 레이버들은 거대한 스피커가 형성하는 음장에 몸을 던지고, 스피커에 매달리고, 의지하고, 다가간다. 스피커 내부의 십자 모양 구조물이 곧 그들의 십자가다. 인간이 트는 음악을 인간이 듣는 일. 이것이 일종의 사회적 사건으로 보일 가능성을 < 시라트 >는 최대한 배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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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으로써 무엇이 얻어지는가? 레이브에는 섣부른 클라이맥스도, 인간의 서사가 그리는 호(弧)도, 명확한 시작과 끝도 없다. 반복과 점진적인 변화만을 허용하는 비트와 펄스만이 계속된다. 무겁게 쿵쿵거리는 드럼 사운드, 스피커의 몸체마저 울리게 하는 낮고 거친 지속음, 거칠게 그르릉대다 천천히 위상을 반전시키며 바람처럼 움직이는 소리들…. 그러나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통제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조건, 우리를 에워싼 또 하나의 자연과 같이 다가온다. 레이버들은 그 자연을 찾아, 그 낙원을 찾아 사막의 내부로 향한다. 그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의 항상성이 담보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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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 시라트 >에는 세 종류의 소리가 있다. 범박하게 나눠보자면 선의 소리, 엔진의 소리, 박동의 소리다. 음악 또는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소리들은 장면과 부분적으로 호응하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한편 이 소리들이 모두 출현해 폭발적으로 맞물리는 순간들이 있는데, 바로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도로의 실선이 점선으로 바뀌고 그 점선들이 길 위의 트럭들로 전환되는 타이틀 직전의 시퀀스는, 영화가 이 소리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 쇳조각을 울리는 듯한 날 선 지속음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길 혹은 시간을, 왱— 하고 돌아가는 엔진 소리는 그 위를 거쳐가는 운동의 리듬을, 맥박 같은 드럼 사운드는 인간들의 박동을 듣게 한다. 레이브를 작동시키는 이 소리들은 영화가 굴러가게 하는 동력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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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고요다. 스피커를 설치하기 전까지 사막은 고요로 가득 차 있다. 소리는 움직임의 결과다. (거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 사막은 그들이 움직일 때에야 바람을 일으키고 바사삭 부서지는 마찰음을 내며 모래의 소리를 되돌려준다. 그들은 그 고요를 헤치고 레이브를 향해 간다. 그들이 왜 레이브로 향하는지, 루이스를 제외한 이들의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결여 혹은 욕망이 그곳에서 채워지기 때문이겠고, 우리는 그들이 레이브를 대하는 방식으로부터 그 동기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레이브의 소리는 음악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춤을 추기 위한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가 없을 때 그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레이브에서 그들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히 역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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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이렇게 바꾸어 이해해 본다. 소리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이들, 그들 자신을 대신해 몸을 작동시킨다. 그 지속음은 그들의 시간이 흐르게 하고, 엔진의 노이즈는 그들의 추진력이, 박동은 그들의 맥박이 되어준다. 어딘가 부서진 이들에게 이 소리들은 오랜 시간 몸을 거기에 꿰맞췄을 때 힘을 발휘하는 보철물 같은 장치가 된다. 소리들을 통해, 그들은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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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어딘가로 향하는 대신 스스로 레이브를 열어 잠시나마 낙원을 만들어내지만, 바로 그 정점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도처에 펼쳐지고, 그들은 시험의 길을 걷는다. 이때 기이한 소리 하나가 출현한다. 땅 위에서 울리던 모든 소리를 압도하며 수직으로 솟구치는, 수수께끼 같은 아르페지오(Arpeggio)의 전자음이다.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는 듯한 음들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남은 이들이 맨몸으로 그 사선을 건너 마침내 기찻길에 오르는 동안, 레이브의 소리들은 다시 한번 소환된다. 그 길에서 닳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들은 사막의 거칠거칠한 질감으로 파편화된 채다. 하지만 출현한 순간부터 한 번도 멎지 않은 저 수직 운동의 소리만은, 홀로 또렷하게 들려온다. 인물들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지만, 소리만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며 영화를 끝맺는다. 이 마지막 소리는 무엇인가. 아마도 낙원 대신 그들에게 주어진 것. 갈 곳을 잃고도 그들을 움직이고 살게 하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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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슬(음악평론가)
음악학을 공부했고 소리와 음악, 혹은 그 사이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음악이라 불리지 못한 소리들, 이름 없는 소리들, 잘 들리지 않는 희미한 소리들에 늘 관심이 간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2019)을 썼고 듣는 책 『만질 수 없는 것을 붙잡기』(2024)를 녹음했으며 『음악 글쓰기 연습』(2026)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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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버린 땅에 ‘레퓨지아’를 다시 짓기​ 

‘에이전트 오렌지.’ 주스를 연상시키는 이 상큼한 단어는, 그러나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제초제인 고엽제의 다른 이름이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각종 화학약품을 사용했다. 밀림 속에 숨어 유령처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적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전술 제초제를 담은 드럼통에 오렌지, 화이트, 블루, 퍼플 등 다양한 색의 띠를 둘러 종류를 구분했기에, 이들에게는 ‘레인보우 제초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제초 작전의 또 다른 목적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일명 ‘베트콩’의 식량 줄을 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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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만 리터가 넘는 독약이 뿌려진 자리에서 맹그로브 숲과 열대 우림은 말라 죽었다. 그리고 그 숲을 집으로 삼은 새와 물고기, 곤충, 포유류도 함께 사라졌다. 전쟁의 독성은 물과 땅으로 스며들어 지속되었고, 그 고통은 당연히 인간의 삶에도 뿌리를 내렸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의 오랜 활동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인들 역시 그 피해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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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에이전트 오렌지뿐이겠는가. 전쟁이 지구행성을 해치는 일은 역사 속에서 거듭 반복돼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남긴 방사성 핵종, 1991년 걸프전 당시 600여 개의 유전이 불타며 수개월 동안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 2006년 레바논 전쟁 중 약 1만 5천 톤의 기름이 지중해로 유출된 사건. 2023년에는 러시아가 점령 중이던 우크라이나 카호우카 댐이 파괴되면서 하류 지역이 대규모로 침수되고, 저수지가 말라붙어 주변 생태계가 고사했다. 이런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그로 인한 자연 파괴가 목록에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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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2014년부터 가자지구 경계를 따라 제초제를 공중 살포해 농지를 말려 죽였다. 2023년 가자지구 폭격은 집과 병원, 학교 등 건축물만이 아니라 올리브 과수원과 농경지, 우물과 해안을 함께 파괴했다. 유엔의 위성 분석에 따르면 2025년 8월을 기준으로 가자지구의 수목 재배지 가운데 97% 이상이 피해를 입었고, 전체 농경지의 98%가 훼손되었거나 접근할 수 없는 상태다. 땅과 나무와 풀과 물과 그와 조화하던 여러 생물, 미생물이 죽었다. 당연히 그에 의지하면서 먹거리를 생산하고 일상을 영위하던 인간들의 삶의 조건 역시 무너졌다. 내 몸 하나 누일 편안한 장소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전방위적으로 뭉개졌으므로, 위험을 피할 최소한의 피난처조차 함께 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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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죽이는 일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해치는 일과 무관하지 않고, 비인간을 상하게 한다는 건 결국 인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을 쉽게 구분하고 분리하지만, 지구행성 위의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이 얽히어 연루되어 있다. 전쟁기계들은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위에서 전략을 짜고 전술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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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얽힘에 기대어, 자연과 어깨를 걸고 함께 싸우는 이들도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 농민 운동가 하나디 무한나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2019년, 그는 가족들과 함께 가자 최초로 씨앗은행을 설립했다. 멸종 위기에 놓인 팔레스타인 토종 씨앗을 지키기 위해서다. 점령 체제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농민에게 상업용 외래 종자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식량 주권을 약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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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나 가족은 토종 씨앗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을 계속해왔다. 지역의 토착 씨앗들은 병충해에도 강하고 척박한 환경을 잘 견디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무한나는 이 프로젝트가 “종자 보존을 넘어, 팔레스타인 문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씨앗엔 풍요로운 문명에 대한 기억 역시 담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집단 학살 과정에서 가자와 서안지구의 씨앗은행을 파괴해버린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다. 씨앗이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는 것을, 씨앗은 인간과의 상호 작용 안에서 여러 우주(pluriverse)를 품고 있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토종 말살 계획은 이렇게 팔레스타인인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일구고 거두어 먹는 일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겠다는 절멸의 의지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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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이스라엘 침공 당시 무한나 가족은 챙길 수 있는 씨앗들을 안고 탈출했다. 그리고 피란지인 데이르알발라에서 새로운 협력 시스템을 만든다. 무한나 가족이 종자, 노동력, 비료를 제공하고 땅 주인이 토지와 물을 대는 방식이다. 그들은 씨앗은행이 보관하던 다양한 작물을 다시 키워내는 걸 목표로 하며, 이 협력 관계는 2026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파괴된 땅에서 씨앗을 다시 심는 일은 과거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전쟁이 끊어놓은 생명의 그물을 다시 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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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파국은 ‘레퓨지아(refugia, 피난처)’의 소멸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재난은 언제든지 닥쳐와 지구행성 위의 다종다양한 존재들을 위협할 수 있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에게는 재난을 피해 숨을 수 있는 피난처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약탈하는 인간)는 그 피난처조차 파괴하는 중이다. 재난 속에서 피할 곳이 없다면, 그것이 비로소 파국이다. 무한나 가족이 씨앗과 함께 살아남는 일은 전쟁이 손상시킨 지구행성에서 작은 레퓨지아를 다시 짓는 일과 같지 않은가. 씨앗을 품은 사람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팔레스타인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살아갈 만한 행성 전체”(안드레아스 말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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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베트남 맹그로브 숲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 이야기의 끝을 아직 보지 않았으니까. ‘호찌민의 허파’라고 불리는 껀저 맹그로브 숲은 전쟁 통에 폭격과 제초제 살포로 까맣게 말라붙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978년부터 파괴된 숲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주민들이 나무를 심고, 그 작은 나무들에 자연의 회복력이 더해지면서 숲은 서서히 되살아났다. 2000년이 되면 유네스코가 이곳을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한다. 인간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힘을 지닌 땅. 인간과 비인간이 의지하고 숨을 쉴 수 있는 레퓨지아. 오늘날 껀저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돌아보는 다크 투어리즘의 장소이자 생명의 경이를 배우는 장소다.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지속해야 하는지, 우리가 껀저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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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다음 글에서 일부를 발췌·인용했다. 손희정, “씨앗으로 미래를 꿈꾼 퓨리오사와 무한나”, < 경향신문 >, 2025.10.22.

손희정(전쟁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목격과 연대
you may be the last witness around okinawa island
​김아현 KIM Ahyun | 2026 | 21min | Korea, Japan | 전체 | 10월 31일(토)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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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아현의 활동명은 ‘해초’다. ‘바다에서 활동하는 민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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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7일, 해초는 한국 사회에 한 통의 편지를 남겼다. 그날 그는 제3회 전쟁과여성영화제 씨네토크에 패널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과 기지촌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 오키나와에 사랑을 담아 From Okinawa with Love >(2023) 상영 뒤 이어지는 행사였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자지구로 출발하는 ‘알라 알 나자르호’에 오르기 위해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 씨네토크 자리에서 해초의 몫까지 뜨거운 이야기를 나눈 정은영 작가가 관객들에게 그가 남긴 편지를 읽어주었다.
 
“길 위에서 또 바다 위에서, 제 몸이 여기와 저기를, 나와 너를,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 제주, 새만금, 오키나와, 대만, 홍콩, 팔레스타인과 수많은 민중들의 연대로 자본과 군사가 만든 봉쇄를 끊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건강히 계세요. 온누리에 평화를 빕니다.”
 
오랜만에 그의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온누리에 평화’라고 중얼거려본다. 해초가 탔던 배는 10월 8일 이스라엘군에 나포되었다. 그는 이틀간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온갖 고초를 겪은 뒤였다. 그리고 2026년 5월 14일, 해초는 튀르키예 항구 마르마리스에서 다시 가자 구호선단에 올랐다가 닷새 후 이스라엘군에 두 번째로 나포되었다. 54척에 이르는 평화선단의 규모에 위협을 느낀 듯, 이스라엘군의 가혹 행위는 첫 번째보다 더 끔찍했다. 다시 한번, 해초의 몸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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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를 뚫는 항해’는 최근의 사건이 아니다. 이미 18년 전부터 바다는 지구행성을 분할하고 영토화하려는 강대국들의 ‘대륙적 세계관’에 맞서는 저항의 물길이 되어왔다. 해초의 항해 역시 작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십대 때부터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를 배웠던 그는 2021년 그곳에서 돛을 다루는 법 역시 익혔다. 그리고 2023년 제주를 출발해 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의 섬들을 거쳐 대만에 이르는 평화 항해에 동참했다. 해초에게 군사주의의 희생양이 된 섬이란 “연결을 기다리는” 고립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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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 may be the last witness around okinawa island >는 그 평화 항해에서 만난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과 바다를 기록한다. 미군은 앞으로 200년 동안 사용할 것이라며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강행하지만, 이에 맞서는 이들은 어쩌면 200년보다 훨씬 긴 시간동안 그곳에서 살아왔을 듀공과 수많은 생명, 그리고 바다와 다양한 물질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목격’은 해초에게 있어 연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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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키나와 섬의 ‘마지막 목격자(last witness)’인 ‘당신(you)’은 누구일까? 이 실험적인 카메라는 해초의 시선으로 기지와 바다와 사람들을 기록하지만, 어느 순간 카메라의 시선은 바다 수면 위아래로 첨벙거리고 사운드는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해진다. ‘당신’이 해초가 목격한 듀공일지, 듀공이 목격한 해초일지, 아니면 이 상호 목격을 목격하는 우리일지, 모호해진다. 그리하여 그 모든 존재들이 공명하며 공감각하는 순간이 ‘the last(마지막이 아닌 최종)’를 구성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 다큐는 디스토피아적인 ‘마지막 목격’이 아닌 온누리에 평화를 비는 마음을 담은 ‘최종적 목격’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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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전쟁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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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배가 가자지구와 레바논에 도착했다 

지금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프란츠 카프카) 같은 책이 있을까. 내게는 올해 나온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책이 있다. 그중 모함메드 엘쿠르드의 『완벽한 피해자』는 본문이 채 시작하기도 전에 나오는 ‘작가 노트’가, 내 안의 얼음 바다를 깨버렸다. 마지막 노트에서 엘쿠르드는 책 전반에 남성 대명사가 과다하게 쓰인 것이 의도라고 밝힌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여성과 아동’으로 축소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과 아동에게서 주체성을,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혁명적으로 기여할 여지를 빼앗는 일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남성을 한층 더 악마화해 죽어 마땅한, 애도할 가치가 없는,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종종 ‘팔레스타인인(the Palestinian)’을 가리켜 ‘그(he)’라는 말을 썼는데, 독자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남성과 얼굴을 맞대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자가 그 복잡하고 모순적인 집단과, 그리고 그저 우리 가운데 온화하고 관대하게 여겨지는 이들만이 아니라―아버지들만이 아니라―투사들과도 씨름하기를 바란다.* 

​한창 페미니즘 책을 만들 땐 원고에서 ‘그녀’를 지우고 ‘그’로 고쳐 쓰곤 했다. ‘그녀’가 성차별적 인칭대명사로 여겨지던 전통이 있었고, 편집이란 ‘통일’을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로서, ‘그’와 ‘그녀’의 차이를 드러내고 둘을 섞어 써도 된다고 결론 내린 2020년엔 숙제 하나를 해결한 듯 후련한 마음이었다. ‘전쟁과여성영화제’라는 타이틀에서 ‘여성’은 누구까지인가. 엘쿠르드가 “팔레스타인 남성의 얼굴을 맞대게 하고 싶어” 팔레스타인인을 ‘그(he)’로 썼다는 말이 페미니스트로서 불편하거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부딪치는 말이라고 느끼는 이는 없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믿으며 이 글을 움직인다. 여성=피해자, 남성=테러리스트라는 학살자들이 짠 프레임을 거부하며. 여러 얼굴의 ‘투사들’을 만나 ‘씨름하기를 바라’며.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 영화 < 아르나의 아이들 Arna’s Children >(2004)을 봤다. 영화는 유대인 활동가 아르나가 1990년대에 제닌 난민촌에서 운영한 극단이자 학교에서 연극을 하던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2001년 하데라 자살 공격, 2002년 제닌 전투의 주역이 되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싸우다 죽은 순교자(사망자)들의 얼굴이 거리에 벽보로 붙는다. 영화를 본 뒤 벽보에 남은 ‘아는’ 얼굴들, 바뀌어가는 제닌의 풍경이 한동안 아른거렸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 그 자리에서 그들 얼굴을 ‘맞대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팔레스타인 작가의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영화를 보는 기회가 귀하기만 하다. 나와 연대자들은 팔레스타인 영화의 상영회를 조직하는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해꿈씨)’에 빚을 지고 있다.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의 이스라엘 영화 < 예스! Yes >(2025) 상영에 항의하며 책방토닥토닥에서 열린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는 마음’ 토크를 해꿈씨 보라 님과 함께 진행한 뒤, 나는 한국의 영화제, 수입·배급사, 시네마테크가 팔레스타인 영화를 더 많이 틀게 할 방법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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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여성영화제가 <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 >를 개막작으로 선정하고, 항해자이자 활동가인 김아현(해초) 감독의 에 주목하여 기쁘다. 특히 김아현의 작품에서 옆으로 기운 채 경계를 따라 흐르던 카메라의 앵글이 위아래로 뒤집히던 순간에 느낀 전율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제주 강정마을과 오키나와, 가자지구가 연결되어 있음을, 영화를 통해 또 김아현의 움직임을 통해 되새긴다. 어쩌면 나는 김아현이 ‘거기’에 가줘서 얻게 된 힘들을, ‘여기’서 모으고 잇고 퍼뜨리는 일을 하며 지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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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집단 학살이 본격화된 이래, 한국에는 여러 팔레스타인 작가의 책이 소개되었고,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등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 출판사 리시올/플레이타임, 서제인과 안팎(박종주) 같은 헌신적인 번역가들이 한국어로 옮긴 글들이 쉼 없이 공개되었다. 이스라엘에 의해 국제 언론이 장악되고 오염된 가운데, 또 현장에서 가자의 소식을 전하던 수많은 언론인이 표적 살해당한 중에도, 우리는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쉬지 않고 보내는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 얼굴들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한/향한)’이라는 부제를 단 앤솔러지 시집 『응답의 시』를 기획한 것은 우리의 응답이, 팔레스타인의 부름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김혜순, 나희덕, 김소연, 김숨, 신해욱, 진은영부터 계미현, 한영원, 이새해, 맹재범, 이실비, 이혜목, 해초까지, 오랜 시간 많은 작품을 발표해온 한국의 대표 시인들부터 등단한 지 몇 해 안 된 시인들, 그리고 문단이라는 테두리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안팎의 시인들까지 47인**이 청탁에 응해, 오직 팔레스타인을 위한/향한 시를 써주었다.

그런데 응답이라니, 온 세계가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집단 학살을 멈추지 않는데, 시로 뭘 하는 게 가당한가. 이런 의심이 들 만도 한데 시인들은 썼다. “‘써야만 한다’와 ‘쓸 수 없다’ 사이에서 혼자 시달리면서”(김혜순), “참담한 마음으로 보잘것없는 한 편의 시를 건네”(나희덕)기로 하며, “유리병 편지처럼 바다 위를 표류하다가 어느 해변에 닿을 것”(김소연)이라 믿으며, “한 곳에서 승인된 폭력은 전염병처럼 모든 것에 옮겨가니까”(진은영), “감히 작은 희망을 품어보며”(오은), “그럼에도 목소리는 조용히 멀리 퍼져 나간다고 주장”(유현아)하며, “완결되지 않은 마음으로 팔레스타인과 함께하고 싶어서”(임솔아), “우리의 시들이 실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안태운) …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이들이 2026년 봄여름 한국에서 동 시기에 팔레스타인을 위한 시를 썼다는 것.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들이 뭐라도 시작해야 뭐라도 가능해진다. 이 지면을 통해 처음 밝히자면 『응답의 시』가 아랍어로 번역될 예정이다.

전쟁이라는 비극과 집단 학살이라는 참상 앞에서 시와 영화는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희덕 시인과 김소연 시인이 언급한 뒤로, 언제 어떻게 닿을지도 모르고 띄운 유리병 편지를 떠올린다. 팔레스타인 시인 리파트 알아리르의 시에 나오는 꼬리가 긴 흰 연을 『응답의 시』 표지에 그려 넣은 뒤로, 하늘의 연을 생각한다. 해초와 조나단 승준 리와 김동현이 가자로 향하는 배를 탄 뒤로, 아름답게 장식한 돛을 단 배를 상상한다. 항해자들이 이스라엘군에 납치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가자에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다에 있을 땐 내일이면 닿는 거리에 가자지구가 있었다 우리들이 탔던 배는 부서졌는데 그 파편이 가자지구와 레바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배는 열일곱 살에 살해당한 리나 알 나불시 그사이에도 아이들은 죽는다 더 큰 시간 속에서 분명 조그만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수없이 도착한다여기 그러니까 가자로*** 

부서진 배가 가자지구와 레바논에 도착했다. 그렇게 수없이 도착하자. “여기 그러니까 가자로.”

* 모함메드 엘쿠르드, 『완벽한 피해자』, 박종주 옮김, 마티, 2026, 14-15쪽.
** 김혜순 나희덕 김소연 김숨 신해욱 진은영 송경동 오은 강성은 유현아 서효인 임경섭 김현 박소란 지현아 송승언 임승유 김영미 임솔아 안태운 권창섭 한연희 희음 윤은성 배시은 장혜령 나하늘 강상헌 박은지 권누리 정재율 한여진 김리윤 김선오 송정원 윤유나 장미도 임유영 박규현 하미나 계미현 한영원 이새해 맹재범 이실비 이혜목 해초(김아현).
*** 해초, 「여기 그리고 저기」, 『응답의 시』, 얼굴들, 2026,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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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영(얼굴들 대표)
영화 기획·마케팅 일을 하다가 출판편집자로 전업한 23년 차 콘텐츠 제조·서비스 노동자. 출판사 마티, 후마니타스, 위즈덤하우스 등에서 일했고, 현재 북살롱 겸 출판사 ‘얼굴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침묵한 적이 없다 
전장이 된 여성 ​A War on Women
라하 시라지 Raha SHIRAZI | 2026 | 107min | Italy, Iran, Canada | 12세 | 11월 1일(일)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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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 스카프 한 장이 각기 다른 세대 이란 여성들의 손을 거친다. 이란계 캐나다인 라하 시라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 전장이 된 여성 >은 영화에 출연한 일곱 여성의 인터뷰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카메라와 조명을 조정하는 동안 제작진은 출연자들에게 히잡을 건넨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은 강하다. 그들은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히잡을 쓰지만 그에 대한 복잡한 마음과 거부감 역시 숨길 수 없다. 히잡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상징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란 근현대사의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히잡을 쓰지 않을 권리’를 넘어선다. 종종 히잡은 이란 여성들이 겪는 모든 억압을 설명하는 이미지가 되고, 그것을 벗기는 행위는 외부의 구원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그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이란 여성들이 스스로 삶을 바꾸기 위해 싸워온 오랜 역사를 가리기도 한다. 영화는 결혼과 이혼, 정치 참여와 교육, 복장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자기 삶의 결정권을 되찾기 위해 싸워온 역사를 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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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여성, 삶, 자유’ 운동은 그 저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쿠르드계 여성 지나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착용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뒤 구금 중 사망하자,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번졌다. 장례식에서 울려 퍼진 쿠르드어 구호 ‘진, 지얀, 아자디(Jin, Jîyan, Azadî·여성, 삶, 자유)’는 같은 뜻의 페르시아어 ‘잔, 젠데기, 아자디(Zan, Zendegi, Azadi)’로 확산되었다. 여성과 남성,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이란 정부는 보안군을 동원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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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영상과 구호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국경을 넘는 연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정세는 늘 그렇듯 복잡하게 흘러갔다. 여성들의 해방 요구는 망명 왕정 지지 세력의 정권 교체 구상과 외국 정부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전용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을 시민들이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얻을 기회라고 포장했다.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투쟁을 외부의 공격을 기다리는 구원 서사로 바꾸려 한 것이다. 이 영화의 공동 작가 사미라 모히에딘은 영화가 이란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것을 경계한 바 있다. 영화가 증언하는 여성들의 투쟁과 영화 바깥에서 그 투쟁을 이용하려는 정치 사이에는 긴장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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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이 된 여성 >이 풀뿌리 저항의 역사를 되짚는 일은 이 전유에 맞서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2022년의 항쟁은 40년 넘게 세대를 거쳐 이어져온 저항에 붙은 폭발적인 불꽃이었다. 영화는 세대와 배경, 입장과 운동 방식이 다른 일곱 여성의 인터뷰를 기록 푸티지와 교차편집한다. 알려진 인권활동가와 희생자 들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수많은 익명의 활동가와 학생, 공장 노동자, 평범한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운동을 지속시켜 왔음을 강조한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기를 기다리며 살아오지 않았다. 자기 삶에서 부딪힌 차별을 말하고, 서로의 경험을 들으며, 함께 행동할 방법을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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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 역사를 주요 운동들을 통해 연결한다. 1970년대 팔라비 왕정 아래 여성문제 담당 장관을 맡았던 마흐나즈 아프하미는 문해 교육과 경제적 자립을 중심으로 추진했던 여성정책을 회고한다. 국가 주도 정책의 성과를 말하면서도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공장과 농장을 찾아 여성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듣던 과정이다. 아프하미의 인터뷰와 함께 제시되는 당시 기록 푸티지에는 히잡을 쓴 여성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자유로웠던 왕정에 대한 향수로 읽는다면, 여성들의 활동을 또다시 국가의 업적으로 회수하게 된다. 1979년 혁명 직후에도 여성들은 권리의 후퇴에 맞서 시위에 나섰다. 이란 여성들은 침묵했던 적이 없다. 기록 필름 속 흔들리는 손과 구호, 혁명을 지지하는 여성과 반대하는 여성들 간의 격렬한 토론은 당시 여성들의 입장과 요구가 단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영상은 오늘의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처음도, 혼자도 아님을 확인시킨다. 정권과 정책이 바뀔 때마다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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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는 거창한 선언과 사소한 검사를 오간다. 여학생들의 가방을 뒤져 거울과 화장품을 찾아내는 손, 히잡을 착용하라고 소리치는 낯선 남자의 호통은 국가의 통제가 일상에서 집행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학교를 기록한 영상 속 소녀들은 어머니가 되는 것으로 자신들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여성은 이 사회에서 꿈도 꿀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어 카메라 앞에서 이란의 유명 가수 구구쉬의 노래를 부른다. “순수한 사랑의 꿈을 꾸려면, 꽃으로 잠자리를 마련해주세요. (…) 우리의 외로움을 함께 나눠요.” 미래의 시간을 빼앗긴 소녀는 꿈을 꿀 권리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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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아시예 아미니는 성폭력과 착취에 내몰린 소녀들이 오히려 범죄자로 처벌받는 사건을 취재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며 미성년자 사형과 투석형 폐지운동에 나섰다. 이 시기 여성들은 차별법을 바꾸기 위해 직접 시민과 만났다. 백만인 서명운동의 소책자와 웹사이트는 결혼, 이혼, 양육, 상속의 불평등을 설명하고 참여자들을 연결했다. 활동가들은 미용실과 상점에서 말을 건네고, 서명을 받으며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남성들도 가부장제가 자신들에게 억압적인 질서임을 인식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며 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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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흐 알리네자드의 인터뷰는 2010년대 들어 그 참여가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설명한다. 휴대전화 카메라는 조직에 속하지 않은 여성도 자기 경험을 공개할 수 있게 했다. 여성들은 히잡을 강요하는 남성과 경찰에게 항의하고 그 장면을 촬영해 공유했다. 여성의 행동을 감시하던 시선에 맞설 수 있는 장치가 생긴 것이다. 알리네자드는 ‘하얀 수요일’ 캠페인을 통해 이러한 영상의 공유와 확산을 조직했다. 한편, 비다 모바헤드의 행동을 계기로 스카프를 막대기에 매달아 흔드는 ‘혁명거리의 소녀들’ 시위도 이어졌다. 아잠 장그라비와 샤파라크 샤자리자데는 다른 여성의 행동에서 용기를 얻어 참여한 경험과 그 대가를 증언한다. 같은 장소에 모이지 않아도 저항은 연결된다. 하지만 체포와 구금, 구타와 독방 생활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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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으로 눈을 잃은 엘라헤 타바콜리안의 증언은 2022년 항쟁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얼굴 곁에는 시위 현장과 숨진 소녀들의 생전 모습이 놓인다. 알리네자드는 서구 언론과 페미니스트들이 누군가 죽고 비극적인 희생자가 되어야 비로소 관심을 갖는다고 비판한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저항을 만들어왔고 지금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운동을 지속시켜왔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강조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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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러 장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여성들의 영상으로 끝난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촬영하고 공유하며 시민 불복종을 이어간다. 체포와 처벌의 위험은 여전하지만 저항은 중단되지 않았다. 앞서 시위 영상 위로 흐르던 쿠로시 야그마이의 노래 ‘골레 야흐(Gole Yakh)’는 그 행동이 감당해온 죽음과 상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저항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을 노래할까. 젊음도 떠나고, 이제 목소리마저 사라졌는데. (…) 내 마음속에는 얼음꽃이 싹텄네.”

조혜영(전쟁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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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그러나 현재형의 싸움
지금, 녜인 Beyond Now, Nyein 
임대청 LIM Daecheong | 2025 | 99min | Korea | 12세 | 11월 1일(일)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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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미얀마. 반세기에 걸친 독재의 끝에 총선이 치러지고,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뤄진다. 그러나 5년 뒤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시민들은 저항을 선택했고, 미얀마의 ‘봄의 혁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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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거리로 나섰다. 미얀마에는 쇠붙이를 두드려 악귀를 쫓는 오랜 풍습이 있다고 한다. 냄비가 찌그러지고 손에 피멍이 맺힐 때까지 두들기는 소리를 타고, 독재의 망령을 몰아내겠다는 의지가 만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와 함께 의료진, 공무원, 철도원, 은행원 등으로 이어지는 대대적인 총파업이 조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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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폭력 시민불복종에 대한 군부의 대답은 실탄 사격이었다. 결국 국민통합정부(NUG) 수립과 함께 시민방위군(PDF)이 결성되고 기존 소수민족 무장 조직들과 연대하면서 미얀마는 다시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으며 이 전쟁은 2026년 10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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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가 일어난 2021년 2월, 미얀마인 녜인따진은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고향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는 한국인 남편 최진배와 함께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두 사람은 페이스북에 < 미얀마 투데이 >라는 페이지를 개설해 미얀마 현지 소식을 번역해 올리는 한편, 한국 언론의 취재 요청에 응하고, 모금을 통해 미얀마의 저항운동을 지원한다. 물론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과도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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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녜인 >은 서로 교차하고 결국은 종합되는 세 개의 트랙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한국인으로서 미얀마를 ‘번역’하는 최진배를 따라간다. 그는 배달 노동을 하는 틈틈이 미얀마의 현실을 알리는 피켓 시위를 하고, 기사를 번역하고, SNS에서 소통한다. 다른 하나는 녜인따진의 시간을 담는다.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식당 노동을 하는 와중에 미얀마 현지 동료들과 단체들에 필요한 지원을 조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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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하나는 연출된 재연 트랙이다. 이 장면들은 담백한 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하는 앞의 두 트랙과는 달리 기울어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고, 환영적이다. 미얀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녜인따진의 몸이 미얀마의 ‘지금’을 보여주는 기록 사진, 영상, 판타지 재연, 그리고 시(詩)를 읽는 소리와 겹쳐진다. 이는 녜인따진의 내면을 시각화하지만, 그에 머물지 않는다. 그를 미얀마 시민들의 집단적인 경험을 매개하는 얼굴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목에 등장하는 ‘녜인’은 코로나와 쿠데타의 시간 속에서 뜻하지 않게 ‘결혼이주여성’이 된 한 사람의 이름이자, 동시에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미얀마와 어떻게든 연결되려는 그 열망의 이름이 된다.
 
2021년 초, 미얀마 소식이 한국 뉴스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격화됐다. 격렬한 국제전의 시대, 미얀마는 이렇게 “잊힌 전쟁터”(최진배, 『포가튼 미얀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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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놓고 경쟁 중이다. 강대국들이 최신 기술을 시험하고 하루하루의 전황이 세계 주식시장에 곧바로 반영되는 거대한 전쟁들 사이에서,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주목 경쟁’을 벌여야 할까. 우리의 한정된 관심은 어떻게 ‘배분’되어야 할까. 그 자체로 이미 너무 이상한 질문들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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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곤란함 속에서도 한 문장을 지치지 않는 마음으로 따라 적고 싶다. 최진배 씨가 『포가튼 미얀마』에서 쓴 문장이다. “미얀마 민주주의 만세.”
 
손희정(전쟁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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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된 행성의 예측 불가능한 이웃들
뉴-빌리지 New‒Village
언메이크랩 Unmake Lab | 2025 | 26min | Korea | 전체 | 11월 1일(일)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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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래를 위한 생태학 Ecology for the Non‒futures
언메이크랩 Unmake Lab | 2023 | 27min | Korea | 전체 | 11월 1일(일)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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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 >에서 화자는 메마른 봄의 산불이 지나간 산을 걸으며 재난 이후의 시간을 고찰한다. 그리고 여름을 기다리던 미래감(未來感)을 떠올린다. 바람과 파도, 모래의 감각만으로도 앞으로의 시간을 기대할 수 있었던 마음이다. 그러나 과거의 데이터를 학습해 예측하고 생성한 이미지들이 미래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여름은 어떻게 다가올까. 재난 이후의 시간에는 무엇이 남을까. 미래를 생성할 수 있다면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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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메이크랩의 < 뉴-빌리지 >와 <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 >에서 자연과 건축 구조물을 찍은 CCTV 영상과 다큐멘터리 푸티지는 친숙하면서도 웃기고 기괴하게 뒤틀린 디지털 생성 이미지와 뒤섞인다. 간척지와 가상 도시, 불탄 산과 생성된 생물들은 서로의 낯섦을 증폭한다. 자연에서 구글 딥드림(DeepDream)의 어지러운 패턴을 알아보는 순간, 기계가 학습한 시각은 우리의 지각으로 되돌아온다. 인공과 자연, 기계와 인간은 서로에게 자기의 눈을 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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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빌리지 >의 삼각주에는 퇴적된 시간을 밀어내며 스마트시티가 내려앉는다. 토마토의 숙성을 학습하던 신경망은 도시 운영의 토대가 된다. 이상 기온으로 붉어지지 않는 토마토 앞에서 시스템은 ‘곧 익을 예정’이라고 진단한다. 과거의 규칙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시스템은 생명의 변화를 예정된 발전의 지연으로 처리한다. 학습된 데이터에 근거한 미래에서 더 이상 기대감을 갖기 어렵듯이, 짭짤한 맛을 길러낸 삼각주를 스마트도시에 빼앗긴 토마토는 숙성된 미래를 맞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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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 >에서 불탄 산의 풍경에도 이러한 시간의 폐쇄성이 깃든다. 실제 산에서는 길조차 연결할 곳을 잃었지만 생성 이미지는 패턴화된 풍경을 막힘없이 내놓는다. 비-풍경은 가장 그럴듯한 재난의 모습이 된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서는 무엇이 불탔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회복에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다. 재난의 ‘이후’를 살아갈 시간은 그렇게 시야에서 지워진다. 이렇게 생성된 이미지의 기묘한 그럴듯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기계 학습을 통한 예측은 낯설지만은 않다. 과거의 학습 데이터에 잠재해 있던 인간의 지각과 시각이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경로를 거쳐 유령처럼 되돌아온다. 트레일캠의 야생동물 이미지를 학습한 기계가 내놓는 생물들에게도 친숙한 눈망울이 달린다. 반려동물이나 캐릭터 인형을 닮은 다정한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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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는 추락의 운동과 닫히지 않는 시간으로 끝난다. 바람에 날린 연에 매단 카메라는 어지럽게 회전하며 추락한다. 그러나 화면 속 추락은 끝없이 이어지고, 충돌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미래는 다가오는 듯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이미 예측으로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재난은 이미 일어났고, 파국은 여전히 예고된다. 예측된 미래가 현재를 붙잡는 동안 우리는 “무엇의 이후”를 사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비미래’는 이렇게 미래의 약속과 이미 벌어진 손상 사이에 우리를 매달아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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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된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묻는 것은 예측과 추출의 정치경제학을 심문하는 한편, 통제를 뚫고 궤도를 이탈해 출현하는 비-존재들을 주의 깊게 살피며 그 출현에 응답하는 돌봄의 기술을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 데이터를 통한 예측과 분류가 생사의 결정에 관여할 때, 군사적 감시와 표적 선정에도 쓰이는 기계 학습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분류하는가. 사람이 좌표와 확률로 환원된 화면에서 살상은 게임의 표적을 지우는 조작처럼 제시될 수 있다. 생성 이미지가 존재한 적 없는 생물을 가시화하는 한편, 군사적 인터페이스는 살아 있는 존재를 제거 가능한 기호로 바꾸어 죽음의 실감을 지운다. 

두 작품에서 사라진 생명의 흔적은 풍경과 박제를 떠돌고, 인간, 동물, 기계의 시각이 뒤엉킨 괴물 같은 형상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그곳에선 예측하지 못한 존재들이 튀어나온다. 언메이크랩은 이러한 얽힘과 어긋남, 실패와 노이즈를 애정 어린 유머와 호기심으로 세심하게 살피며, 분류와 통제에서 벗어난 이웃들을 알아차리는 기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조혜영(전쟁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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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질 존재들의 안부 

피스모모 사무실에서 밥을 챙겨주던 치즈 고양이가 사라졌다. 작고 동글동글한 고양이, 고소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고양이에게 ‘체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경계심이 많아 좀처럼 사람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던 체다는 밥그릇만큼은 야무지게 비워내곤 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어느 겨울날, 체다는 사무실 앞에 마련해준 겨울나기 상자 안에 꼬물꼬물 새끼 고양이를 낳았다. 네 마리였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체다는 거짓말처럼 새끼들을 데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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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사무실 옆 빌라 4층에 사는 이웃이 말을 건네왔다. 혹시 노란 고양이를 보았느냐고, 자기 집 문 앞에 새끼를 낳아두더니 그새 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무실에서 출산한 뒤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모양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체다가 두 번째 보금자리를 틀었던 그 추운 계단 밑에서 새끼 네 마리 중 한 마리가 숨을 거두었고, 이웃이 그 작고 차가운 몸을 거두어 묻어주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체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미 고양이는 출산 후 집을 세 번 옮긴다는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저 어딘가 바람이 덜 드는 구석에서 무사히 지내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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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피스모모의 인스타그램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같은 골목에 사는 또 다른 이웃이었다. 며칠 전, 어떤 주민에게 폭행당하던 체다를 구조해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다급한 연락이었다. 밥을 챙겨주던 피스모모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그분도 이 작은 고양이를 ‘체다’라고 불러 놀랍고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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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만난 이웃에게 전해 들은 그날의 기억은 참혹하고도 서글펐다. 골목의 한 주민이 길다란 플라스틱 빗자루로 체다와 새끼들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걸 목격했다는 것이다. 대문 너머로 그 광경을 본 이웃이 멈추라고 소리치는 사이, 대문 밑 틈새로 겨우 빠져나온 체다는 그분의 손길에 구조되었지만 남겨진 새끼들의 행방은 끝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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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폭력으로 체다는 부러진 앞니 네 개를 모두 뽑아야 했다. 잃어버린 새끼들의 운명을 직감해서였을까, 체다는 치솟는 염증 수치와 싸우며 긴 시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 감사하게도 구조해준 이웃이 기꺼이 모든 치료비를 감당해주었고, 나는 체다가 좋은 가족을 만날 때까지 ‘임시 보호’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체다는 내 곁에서 말랑하고 통통한 배를 드러낸 채 골골거리며 뒹굴고 있다. ‘임시 보호’가 어느새 ‘상시 보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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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다에게 빗자루를 휘두른 사람은 놀랍게도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젖을 먹이는 어미 고양이에게 빗자루를 내리칠 수 있는 사람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휘두른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형광 초록색의 길다란 플라스틱 빗자루였다. 바닥을 쓸 때마다 조금씩 갈려나가는 플라스틱 가루처럼, 일상의 장면들 속에 촘촘히 박혀 썩지도 않을 폭력의 분진을 생각한다. 그는 대체 누구인가. 그의 활동에는 일부 동물들을 보호하는 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이웃인가, 나는 그의 이웃일 수 있는가.
앞니 네 개를 잃고도 사료를 오도독 오도독 씹으며 살이 포동포동하게 찌고 있는 체다, 나는 골골거리다 잠든 체다의 말랑한 배에 배방구를 하고 냥냥펀치를 얻어맞는 걸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 온몸을 움찔하는 체다의 습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빗자루가 머리 위로 떨어지던 그 기억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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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체다의 삶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골목의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마주친 생명의 위태로움에 응답했다. 밥그릇을 채우고, 작은 주검을 묻어주고, 대문 너머를 향해 멈추라고 소리쳤던 그 순간들은 우연하고도 질긴 구원의 그물망이 되었다.
 
알려진 전쟁의 소식들과 알려지지조차 못한 전쟁의 소식들, 한 편에서 끊임없는 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새로운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세계. 더 빨리, 더 많이, 더 강력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고 제거하려는 세계. 지금도 어디선가 집이 불타고, 숲이 쓰러지고, 그곳에 살던 존재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날 것이다.
 
이 모든 장면들이 암담하고 꼭 나를 압도할 것처럼 느껴질 때면 우연처럼 체다를 살려낸 골목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다급하게, 조율되지 못한 채로 제각각 손을 내밀어 건져 올린 작은 존재의 생명처럼, 전쟁을 멈추라는 조그만 목소리들도 분주하게 서로를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썩지 않을 것들로 가득 채워진 이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세계에서 어떻게, 계속,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이야기하는 불안정한 삶과 예측할 수 없는 만남들을 생각한다. 체다와 골목의 이웃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도, 서로의 삶에 얽혀들며 달라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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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무결한 구원자가 될 수 없으며, 모두가 이미 상처 입은 세계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완벽한 안전이나 거창한 승리 같은 약속이 없는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되며, 모든 존재는 서로의 취약함에 기대어 살아남는다. 폐허 속에서도 기어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훼손된 땅 위에서 다시 관계를 엮어내는 것. 썩지 않을 무기로 가득 채운 세계에서 보란듯이 잘 썩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손상된 행성에서 함께 익혀가야 할 다정한 기술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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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아영(피스모모 대표)
2012년 동료들과 ‘피스모모’를 창립했다. 피스모모의 이름에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의 앞 글자와 미하엘 엔데의 소설 주인공 ‘모모’의 의미가 담겨 있다. 흐릿하고 희미한 것들을 오래 바라보고 싶고, 활활 타오르기보다는 잔잔하게 따듯하고 싶다. 북한산이 보이는 곳에서 다정한 고양이들과 함께 산다.